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고골 (문단 편집) == 생애 ==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이긴 한데 출신지는 동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정확히는 폴란드계와 우크라이나(거기에 [[카자크]]계 조상을 두었다)계 [[혼혈]]. 일단 고골 본인은 러시아어는 [[제2 외국어]]로, 우크라이나어를 모어로 생각한 모양이며, 고골의 원래 성 역시 호홀야노우스키로 폴란드계 느낌이 강했다. 고골이라는 성씨는 부유한 카자크인 오스타프 호홀(Остап Гоголь)의 딸과 결혼하여 얼마간의 토지와 130여명의 농노를 소유하게 된 오파나스 데미야노비치 호홀야노우스키(Опанас Дем'янович Гоголь-Яновський, 고골의 친할아버지)에 의해서 붙여졌기에 그의 핏줄을 보면 꽤 복잡하다. 이 때문인지 카자크계로도 대접받아서 카자크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의 민담과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타라스 불바에서 [[카자크]] 사람들이 멋지게 나오는 게 다 이유가 있다. 자신의 조상 이야기이기도 하다만.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제법 잘 살던 시골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전원 생활을 겪으며 자라났다. 엄격한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광신적인 [[그리스도교]]도라서 젊은 시절 종교에 대한 허무함(아무리 기도해도 결국 신은 외면한다)을 담게되는 토대가 된다. 또한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부인에게는 한없이 약한 모습만을 보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항상 고함과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에게 [[여성공포증]]을 심어준다. 그는 커가면서 정치인으로 나서고자 했으나. 인맥과 돈이 없으면 불가능한 현실에 좌절하고 1829년 처녀작인 시집 <간츠 큐헬가르텐(Ганц Кюхельгартен)>을 스스로 돈들여 내지만, 겨우 250부가 팔렸으며 악평을 호되게 당하자, 시집을 죄다 회수하여 직접 불태워버리고 만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및 카자크 민담을 섞어서 만든 마녀와 정령들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 호러 소설 모음집인 <디칸카 지역의 밤 이야기(Вечера на хуторе близ Диканьки)>를 1831~32년에 2권으로 걸쳐 냈는데 꽤 호평을 받으며 어느 정도 잘 팔리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곧이어 발표한 단편 모음집인 미르고로드도 성공하면서[* 여기에 유명한 [[비이]]나 대장 불리바로 알려진 타라스 불바가 실려있다.] 이름을 더 알리게 되는데 당시 대작가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칭찬하면서 그는 유명해졌고 생활도 나아진다. 이 시절 하급공무원으로 1년동안 일하면서 겪은 부조리는 나중에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중세역사 전문 선생으로 일하면서 대학교 조교수까지 일했으나 작품에 전념하고자 3년만에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그만둔다.[*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강의방식에 대해 학생들이 비판적이었기에 자신감을 잃어 퇴직했다고 한다. 당시 고골의 제자였던 사람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고골은 자신의 키 높이만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읽다가 가끔 혼자 키득거렸다고 한다. 이런 탓에 당시 학생들은 그의 강의가 매우 재미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몇 없었다고 한다.] 뒤를 이어 부조리와 부정을 풍자한 <감찰관>이 연극으로 상영되어 큰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이 연극에 대하여 [[니콜라이 1세]]가 불쾌하게 여기면서 연극은 상영중단되고 그도 위협을 느끼고 1836년 [[이탈리아]] [[로마]]로 몸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존경하던 선배 푸시킨이 아내의 [[불륜]] 때문에 총싸움을 벌이다가 허무하게 죽은 걸 뒤늦게 듣고 슬퍼하며 그를 기리는 시도 썼다. 6년동안 이탈리아에서 있다가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그의 최고 걸작으로 추앙받는 <죽은 혼>을 발표하며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죽은 혼 2부에서 긍정적 인물상을 그리려는 시도가 계속 실패하게 되자 결국 스스로도 작가로서 죽었다고 절규할 정도로 슬럼프에 빠진다. 이어 찾아온 우울증과 여러가지 병세까지 겹쳐서 작품활동은 더더욱 부진에 빠졌고 1847년에 쓴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간추린 글>이라는 책을 내놓았다가 그를 찬양하던 이들에게 실망과 분노어린 비난을 받게 된다. 그동안 그리도 혐오하며 비꼬던 사회 부조리, 지배 권력, 종교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더욱 절망감이 깊어져가서 기분을 풀고자 1848년 [[팔레스타인]]까지 여행을 갔으나 일절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얼마나 절망했으면 [[예수]] 동상 밑에서 미치도록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러시아로 돌아온 고골은 이곳 저곳 떠돌아다녔고, 죽은 혼 2부를 집필했지만, 1851년 말부터는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톨스토이 백작의 집에서 세 들어살았다가 1852년 들어서는 친구의 누이인 예키테리나 미하일로브나가 사망하고 나서는 광신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때부터 집필을 포기하고, 화요일마다 금식을 꼬박꼬박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때 마침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고골은 2월 5일부터 단식을 시작하였고, 그날부터 평소에도 절식을 하였다. 처음에는 죽은 혼 2부 원고를 톨스토이 백작을 통해 대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톨스토이 백작은 그 원고를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광신적인 [[정교회]] [[사제(성직자)|사제]]로부터 [[사탄]]의 유혹인 글을 포기하라는 권고에 가차없이 그동안 심기일전하여 쓰던 죽은 혼 2부를 스스로 불태워 버린다. 다만 다 불태우진 않고 하인이 일부를 수습해서 죽은 혼 2부 일부분이 남아있지만 줄거리가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게 되었다. 고골은 원고를 불태운 뒤에 톨스토이 백작에게 원래는 원고의 일부만 불태우려고 했지만, 악령에게 벗어나기 위해 전부 불태웠다고 말하고, 친구들의 만류에도 단식을 고수했으며 18일부터는 모든 음식물의 섭취를 중단했다. 결국 친구들과 지인들은 2월 20일에 의사를 불러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고 했지만, 그날 밤 고골은 의식을 잃었고, 그 다음날인 2월 21일 아침에 유언도 못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